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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여행기 둘째날 (2) – SBS 드라마 서동요 촬영지, 성흥산성 (2/2)


대한민국 2008.04.15 01:39

애초에 성흥산성을 찾은 이유는 2006년에 S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서동요”가 촬영된 곳이라는 것을 어디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서동요 셋트장은 일정이 맞지 않아서 찾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 가야겠다). 문제의 나무는 남문터를 지나면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데, 남문터까지 올라가기 전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사진 찍는 솜씨가 아직 영 아니어서 여러 컷을 찍었는데 건질만한 사진은 이것뿐이었다(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우연히 봤는데 정말 비교도 안되게 찍었다-_-). 사실 성흥산성으로 구글이나 검색포탈에서 찾으면 온통 이 나무 사진이 나온다. 드라마의 힘이 대단하긴 한 것 같다. 서동요 드라마를 난 몇 편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서동요를 찍은 나무NIKON D40 |

서동요를 찍은 나무


사진에 보이는 보기 흉한 네모난 것이 이곳에서 서동요를 찍었다는 안내 간판이다. 안내 간판을 살펴보니 방송에서 서동과 선화공주가 사랑을 약속하는 장면을 캡춰해 놓았고, 이곳에서 드라마 서동요를 찍었다는 내용이 쓰여져 있는데 관리가 너무 안되어 저렇게 쓰러져 있고 빛바래져 있었다. 성흥산성을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좀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이왕 올라온 거, 성흥산성 안을 돌아봤다. 성흥산성은 소위 “테뫼식 산성”으로 분류된다. 이 형식은 산 중턱이 아닌 산 정상 봉우리를 중심으로 성벽을 쌓은 산성이다. 물론 정상 주변에 어느 정도 병사들이 머무를 수 있고 시설물을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 형식은 정상 주변에 성벽을 쌓기 때문에 공격하기 무척 어렵지만, 반대로 많은 병력이 주둔하기 곤란하다. 성 내부가 좁고 수원 확보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직접 둘러보니 내가 보기엔 병력은 많아도 1000명도 주둔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성 안의 어느 샘물터에 5천 병사들의 우물터로 사용되었다는 안내 간판도 있었다. 그날 오후에 본 부소산성(사비성)도 그리 넓지 않아 과연 그곳이 왕성이 맞는지 의심스럽기조차 했다.

정자나무를 뒤로 하고 조금 안쪽으로 걸어가보면 을씨년스런 사당이 하나 나온다. 의외로 이 사당은 고려의 개국 공신인 유금필의 사당이다. 후삼국 시대에도 이 지역은 후백제의 영역이었던 모양인데, 후백제 멸망 후 잔당들이 노략질을 일삼어 유금필이 이들을 섬멸하고 군량을 나눠주며 백성들을 위무하여 그가 941년에 죽자 고려 태조가 이 사당을 세웠다고 한다.

유금필 장군 사당NIKON D40 |

유금필 장군 사당


그러나 사진에서 보듯 이곳도 역시 관리는 제대로 안되어 있다. 문창호지에 구멍이 숭숭나 있는 것이 보이는지? 뭐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듯 한 분위기였다. 아까 정자나무도 그러더만 이곳도 너무 부실하게 관리하는 듯 했다. 문도 잠겨있어서 안으로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이것도 안내 간판에 따르자면 1000년이 넘은 사적일터, 부여군청의 조치가 아쉬울 뿐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보면 웬 정자도 하나 나온다. 성흥루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정자인데, 별로 그다지 눈에 확 띄는 정자는 아니었다.

성흥산성은 안쪽보다는 성벽을 따라 산책하는 것이 낫다. 대충 정자를 뒤로 하고 성벽을 따라 걸었는데, 남문터 옆에는 돌로 구축되어 있었지만, 나머지는 흙으로 쌓여져 있었다. 그냥 흙으로 쌓은 성벽(土壁)은 일반적인 언덕처럼 보이기 쉬운데, 안쪽에 참호처럼 되어 있거나 경사가 일정하게 급하여 그럭저럭 구분이 가능하다. 다만, 동문쪽은 경사가 워낙 가파른데다가 11월 말이라 얼음과 서리가 잔뜩 끼어있어서 무척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다.

성흥산성 성벽의 일부NIKON D40 |

성흥산성 성벽의 일부


오솔길처럼 보이시겠지만, 아니다. 성벽이다. 이 사진은 무척 조심스럽게 내리막 성벽을 내려온 다음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뒤로 돌아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 길처럼 보이는 것이 성벽이다. 오랜 세월 관리가 되지 않아 자연의 힘으로 저렇게 길처럼 변한 것뿐이다. 오른쪽은 급경사의 성벽이다. 사람 하나 지나가기도 쉽지 않을 정도로 좁은 길이다. 여기서 보면 성벽처럼 느껴지지 않겠지만, 다음 사진을 보면 확실히 여기가 성벽이란 걸 알 수 있다.

성흥산성 성벽의 일부NIKON D40 |

성흥산성 성벽의 일부. 그냥 언덕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왼쪽이 성벽 바깥이고, 오른쪽에 야트막한 곳이 성벽 안쪽이다. 이쪽 성벽은 그나마 경사가 좀 덜 가파른 편이다. 공격군은 급경사로 이뤄진 성벽을 올라가야 하지만 방어군은 야트막한 참호 수준의 성벽에서 아래로 화살을 쏘거나 돌을 던져도 되고 무거운 장비를 가지고 겨우 올라와 지친 공격군을 무찌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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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흥산성 성벽의 일부NIKON D40 |

성흥산성 성벽의 일부. 토축 성벽이다.


이쪽은 더 확실하게 보인다. 이곳은 서쪽 벽 정도 된다. 동쪽 성벽에 비해 성벽 형태가 보다 더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오랜 세월 많이 무너진 모습에서 세월과 자연에는 당해낼 것이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사후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 지도 새삼 느꼈다. 숭례문 같은 일이 또 벌어져서야 되겠는가.

성흥산성 성벽의 일부NIKON D40 |

성흥산성 성벽의 일부. 성벽 전체가 토축은 아니고, 일부는 석축으로 되어 있다.


이곳은 석축으로 된 성벽이다. 남문터와 연결된 곳이다. 이곳만은 돌로 쌓여져 있는데, 백제 시대 당시의 것인지 아니면 일부 복원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성들은 전편에서도 얘기했듯이 석재로 만든 평지성보다 이렇게 흙으로 쌓은 산성이 더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드라마는 모두 평지의 벽돌 같은 돌로 쌓은 성에서 전투 장면을 촬영한다(남한산성이 서울 성곽이 이런 형태의 성벽이다). 아무래도 돌로 쌓은 성이 전투 장면에서는 더 멋있고 장엄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렇게 흙으로 쌓은 산성에서 전투 장면을 촬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 듯 하다. 제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성도 별로 없기도 하고, 이렇게 경사가 급한 산성에서 촬영을 한다는 것은 사고 위험도 높겠다. 차량이 남문 앞까지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촬영 장비를 실어 나르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위험천만한 동쪽 성벽을 지나오니 우물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산성 내 우물.NIKON D40 |

산성 내 우물.


바가지도 있었지만, 물은 마시지 못했다. 대신에 가방에서 새벽에 편의점에서 산 물을 마셨다.(-_-) 저 우물로 나당연합군 5천명의 식수를 해결했다는 안내 간판의 설명이 정말 맞는지 모르겠다. 여기 말고도 유금필 사당 아래쪽에도 우물이 하나 더 있었다. 인터넷에서 뒤져보니 우물이 3군데라는데 더는 보지 못했다.

성흥산성이 자리한 산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러나 주변의 산은 대부분 이 산보다 낮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사방이 훤하다. 이런 곳이니 부여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 이곳에 성을 쌓은 이유가 짐작되었다. 올라와보지 않으면 이곳의 군사적 가치는 쉽게 인식하기 힘들겠다. 글로만 봐서는 실감하기 힘들다.

성흥산성에서 내려본 모습NIKON D40 |

성흥산성에서 내려본 모습


안개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는 하지만, 날씨 좋은 날에는 훤히 보일 것 같다. 이곳에 앉아 주변의 천하를 돌아보았을 백제 왕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려오는 길에 대조사를 들렀다. 그러나 불상 말고는 볼 게 없었다. 대조사의 미륵보살입상인데, 보물 27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조사 미륵석불NIKON D40 |

대조사 미륵석불


사찰은 백제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미륵보살상은 고려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거대한 바위 하나를 통째로 깍은 듯한 불상이다. 누구는 땅에서 솟은 듯한 형상이라고도 한다. 그러고보니 옛 백제 땅에는 유난히 미륵보살을 숭앙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익산 미륵사지나 금동미륵보살반가상 같은 걸 보면 유난히 이 지역에 미륵보살을 숭앙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 같다. 불교신문 2008년 3월 26일 자에는 아예 백제와 신라가 미륵신앙을 미래를 향한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고 언급하고 있는 걸 보면 유난히 강했던 게 이해도 되지 싶다.

내가 갔을 때 대조사는 사찰 중건을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마무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공사판을 뒤로 하고 성흥산성을 떠났다. 다시 부여읍으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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