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추모글 남기기



■ 부여 여행기 둘째날 (1) – SBS 드라마 서동요 촬영지, 성흥산성 (1/2)


대한민국 2008.03.19 01:51

모텔에 누웠지만, 잠은 거의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외지를 나가 혼자 자면 거의 잠을 못잔다. 잠자리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숙박시설들이 보통 정오를 기준으로 추가 요금을 받는 것 때문에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후자라면, 의외로 난 소심쟁이란 말인가). 결국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설치다가 새벽에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여행지에서 숙면을 취하는 것도 문제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어서 나선 탓에 거리는 매우 어두웠다. 근처 편의점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전날 노선번호를 미리 봐둔 터였다. 어둠 속에서 담배 하나 꼬나물었다. 날씨가 추웠다.

그 새벽에 갈려고 했던 곳은 부여읍에서 직선거리로 약 12km 남쪽인 임천면에 소재한 성흥산성(聖興山城) 이다. 성흥산성은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세워진 산성으로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3년조에 “8월에 가림성(加林城)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에게 지키게 했다”고 되어 있다. 성흥산성은 축성된 연도가 명확히 나타나 있는 몇 안되는 사례라고 한다. 위사좌평은 백제에서 최고위직 중 하나인데, 그런 관직의 사람에게 성을 지키게 했다면 이 성이 동성왕에게는 그만큼 중요했던 성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백가는 동성왕이 죽고 무령왕이 즉위하자 이 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중용했는데 웬 반란일까. 당사자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모양이다. 동성왕을 암살하고 일으킨 반란이라는데 왕위가 탐났던 것일까? 어딜가나 욕심이 꼭 사고를 일으킨다.

우리나라는 적어도 삼국시대부터 산성 위주의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제작한 문화유적총람 CD에 보면 남한에 분포된 성곽만 2,137개소라고 하니 많기는 정말 많다.[각주:1] 평지에 쌓여진 성은 적은 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6년에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라고 되어 있고, 조선시대에도 산성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서울 성곽도 결국 산에 성벽을 쌓았고, 남한산성, 북한산성 등을 중요시했으니 말이다. 전 국토의 75%가 산악 지형이라 산성이 자연스럽게 발달했을 것이다. 또, 산성은 나름대로 이점도 많은데, 산성은 일단 쌓아두면 멀리까지 관찰할 수 있고(이를 군사 용어로는 “감제한다”고 한다), 적의 움직임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또 적이 산성을 공격하려면 험난한 경사지를 무기를 들고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싸우기도 전에 지치게 된다. 삼국시대에 잘 닦여진 등산로가 있을 리 없으니까. 한국 전쟁 때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벌어진 고지전도 이와 마찬가지다.

다만, 산성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물과 식량이 충분해야 한다. 물과 식량이 없으면 오히려 산성은 아군을 죽이는 독이 되버린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저항하다가 결국 항복한 것도 물과 식량이 없었고, 주변에 원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성의 입지를 선택할 때도 물이 충분한 산인지, 그리고 어느 정도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지를 먼저 살폈다. 남한산성은 그런 조건이나 군사적 입지가 좋아 오랫동안 중요시여겨졌지만, 인조는 물과 식량이 부족했다. 또, 산성은 산성 그 자체로만 방어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산성은 주변의 산성들과 연계하여 적을 견제하였고, 평지에서 지원부대가 적과 싸우기 시작하면 같이 호응하기도 한다. 산성은 모루가 되어 적을 붙잡아두어 망치가 달려와 내려칠 때 같이 치든가, 성에 주둔하고 있던 수비대가 경우에 따라서 다른 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고구려나 고려때도 그런 양상을 보였다.

백제 산성들은 높은 산악지형보다는 낮은 구릉이나 야산이 많았던 지형 때문에 신라나 고구려보다는 비교적 낮은 곳에 산성들이 위치한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그 “낮은 산”들도 산이다…….. ㅡ.ㅡ;; 그러나 낮은 곳이라 해도 주변 지형을 잘 감제할 수 있는 지역이면 산성 입지로 충분했다.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을 벌였을 때 최후의 전투가 된 매소성도 높지 않은, 야트막한 구릉이었을 뿐이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캉 일대에서 벌어진 영국군과 독일군의 전투때는 고작 163m에 불과한 고지 하나를 둘러싸고 한 달여를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백제 산성들도 낮은 산이라 해도 입지 선정은 그런 관점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백제 산성들은 규모가 작다. 신라가 백제와 국경 지대에 쌓은 삼년산성(충북 보은에 있다)은 몇 만의 병력이 주둔했을 정도라는데, 백제 산성들은 규모가 작은 편이라 한다. 실제로 본 성흥산성과 부소산성 모두 만 단위의 병력은 커녕 수백~수천명도 수용하기 힘들어보였다.

북한 학자 함인호는 <백제의 성곽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달리 대륙의 침략세력과 큰 전쟁을 치르지 않은 국가”여서 작은 산성들로 충분했다고 주장하지만[각주:2], 우리나라 재야사학자들이 이 견해에 동의할 지는 잘 모르겠다. 《백제 산성의 이해》를 쓴 심정보는 백제 산성들이 가까운 거리의 낮은 산에 분산되어 적이 쳐들어오면 상호 연계하여 서로를 지키는 데 적합한 체계라고 쓰고 있는데, 성흥산성은 도성 방어를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부소산성 바로 옆에 청마산성이란 산성도 별도로 있으며, 성흥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우두성도 있다. 우두성은 앞서 언급한 좌평 백가가 반란을 일으킬 당시 토벌군이 주둔했던 성으로, <백제 산성의 이해>에서는 이 성이 아주 밀접한 거리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얘기는 거꾸로 말하면 우두성이 현재 어디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뭐 그건 그렇고 무척 춥다. 12월 첫째날 새벽이었다.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바람을 피해보기도 하지만, 새벽이라 역시 춥다. 다른 번호의 버스들은 잘만 지나가는데 왜 임천면 가는 버스만 안오는 건지. 날이 추워서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이 아저씨, 성흥산성이 뭐냐고 나한테 되묻는다. 이런 저런 예기를 하는데 자기는 고향이 부여읍이지만 서울에서 오래 살다가 다시 귀향한 터라 잘 모른다고 한다. 정말인지 의심스럽다. 전 날 하도 부여읍내를 뺀질나게 돌아다녀서 부여읍내 중심지는 다 길을 외우다시피했고, 지도도 확인한 터인 데, 임천면으로 가는 길은 계백 장군 동상을 동서로 지나가 백제 대교를 건너야 하는데 엉뚱하게 부소산성 쪽으로 가는게 아닌가.

“아저씨, 이 쪽이 아닌데요.”
“엇, 그래요? 잠시만요”

속도를 늦추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물어본다. 서울에서 택시를 탈때도 나보다도 길을 몰라 내가 길을 가르쳐준 적이 몇 번 있는데, 똑같은 꼴을 여기서도 겪게 될 줄이야. 그래도 다시 길을 제대로 들어가길래 그냥 탔다. 새벽의 시골길, 어두워서 뭐 보이지도 않는다. 택시 기사도 임천면과 성흥산성은 처음 가보는 모양이다.

성흥산성 가는 길


임천면으로 접어드니 성흥산성 간판이 보였다. 택시 기사도 이쪽이 초행길이었는지 끝까지 가볼 태세다. 아마 부여읍에서 해멨던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한참을 올라간다. 나중에 성흥산성에 도착하고서야 알았지만, 남문 바로 앞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지만, 일단 성흥산성과 대조사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내렸다. 길은 차로 충분히 지나갈 수 있었고, 길 양쪽으로는 간단한 운동기구도 비치되어 있었다. 지역 주민들의 산책로로 쓰이는 모양이다. 대조사는 성흥산성 아래쪽에 자리한 작은 절이다. 이곳은 성흥산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잠시 들리게 된다.

아침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올 즈음, 성흥산성 남문에 도착했다. 남문 앞에는 매점이 있었는데, 어떤 아줌마 둘이 나와 있었다. 카메라를 메고 걸어가는 날 보더니 뒤에서 수근댄다. 이 시간에 웬 사진기를 들고 오는 사람이 있네 라며. 아마 그 시간에, 카메라를 들고 성흥산성을 찾은 사람이 없나 보다. 성흥산성으로 올라가는 자동차 도로는 남문 앞까지 닦여 있지만, 정작 남문은 좁은 계단으로 다시 또 올라가야 한다.


빛이 모자랐던가. 아니면 찍사가 문제있나. 아무리 봐도 사진이 흔들렸다. 이 계단이 백제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왼쪽에 보이는 바위는 무척 커서 그냥은 못올라가고, 오직 이 계단을 통해서만 남문으로 갈 수 있다. 산 위에 있으면서 성문도 저렇게 좁은 통로로 올라가야 하니,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이곳에 주둔하던 백제 부흥군을 공격도 못하고 두려워했다고 한 말이 빈말이 아닌가 보다. 좁은 계단은 2명도 겨우 지나가겠다. (물론 난 나 혼자서 다 차지했다 ;;). 계단 좌우로 흙언덕이면 어떻게 해보겠것만, 아래 사진처럼 남문쪽은 거대한 바위다. 갑주를 걸치고 창과 칼을 들고 저길 올라가기는 아무래도 힘들겠지?

성문 가는 길의 거대한 바위


이 사진은 계단의 왼쪽면을 차지한 거대한 바위다. 이 바위 건너편에 남문이 있다. 성흥산성의 다른 문들은 흔적만 남아 있고, 남문은 좀 남아 있다. 아래 사진이 성흥산성 남문으로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이다. 기단부와 일부만 남았는데, 성문 자체도 무척 폭이 좁다. 계단 때문에 마차도, 소도, 말도 어차피 못올라올테니 사람들이 다 날랐을 것이다. 이런 곳에 어떻게 성을 지었을까?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기사 이런 곳이니 성을 지을 생각들도 했겠지만.

성흥산성 남문터


여기서부터 성흥산성이 시작된다. 날이 완연히 밝아오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골랐다.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소 내 생활 습관으로는 도저히 못볼 광경이 발 아래 펼쳐졌다.


이 사진은 사실 산성에서 내려올때 찍은 것이다.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는데, 해가 구름 사이로 서서히 빛을 내뿜고 있었다. 평소 내 생활습관으로는 절대 못볼 광경이다.

산성 남문에서 찍은 아직 푸르스름할때 찍은 것들.



산성에서 동쪽을 찍은 것이다. 안개가 많이 끼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게 안개일까, 구름이 낮게 깔린 건 아닐까. 위에서는 발 아래 굽어보는 저것들이 땅에 내려가면 내 앞을 가린다. 


  1. 《백제 산성의 이해》, 심정보 저, (도서출판 주류성, 2004년 7월 30일), 12쪽 [본문으로]
  2. 《백제 산성의 이해》, 심정보 저, (도서출판 주류성, 2004년 7월 30일), 11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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