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추모글 남기기



■ 부여 여행기 둘째날 (3) - 부소산성


대한민국 2008.08.19 22:12
성흥산성에서 내려온 나는 다시 부여읍으로 가서 국립박물관과 부소산성을 둘러보았다. 부여국립박물관은 웬지 모르게 초라하게 느껴졌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유물이 다 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규모가 작아 실망스러웠다. 백제금동대항로, 칠지도, 그리고 송국리 유적을 재현해놓은 디오라마 정도만 눈에 들어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 1, 2) 송국리 유적을 재현해놓은 디오라마


국립박물관에서는 "송국리형 문화"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청동기 시대 중기에 해당한다는 데 안내판에는 "송국리 유적의 유구와 유물은 다른 지역과 비교할때 독특한 특성을 보이므로" 송국리형문화라고 한다고 씌여 있었다. 다른 유적의 유물과 유구를 본 적도 없고 전문가도 아니니 그런가보다 할 뿐이지만, 그것보다 디오라마를 정말 잘 만들었다는 생각에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 3,4) 칠지도(오른쪽)와 백제금동대향로(왼쪽)

백제금동대향로는 지난 1993년에 능산리 고분 주차장 부지에서 정말 우연히 발견되었다.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에 진흙 속에 천에 감싸인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지난 2002년 4월 27일에 KBS 역사스페셜에서 아주 자세히 다룬 바 있다. 나도 그 기억이 떠올라 금동대향로를 유심히 4면으로 바라보았다. 책(역사스페셜을 책으로 낸 것) 속의 사진과 방송에서 봤던 기억을 더듬어보며 살펴보았지만, 새겨진 조각들이 너무나 작아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굉장히 섬세하고 정교했다. 지금 사람들은 과연 저렇게 만들 수 있을까? "대충대충 빨리빨리"가 몸에 밴 지금 우리들하고 너무나 달라보였다. 지금 저 대향로를 똑같이 과연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보니 박물관에 전시 중인 저것도 진품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칠지도는 비문 문제로 한일 역사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문제때문인데 한국과 북한은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칠지도를 하사했다고 해석하고 있고, 일본은 당연히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바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명문에 쓰인 연호 인정 문제도 논란거리고, 백제 왕자가 일본 왕실에 선물한 것은 맞는데 그것이 "헌상"인지, "하사"인지를 놓고 싸우는 것이다. 칠지도 관련 기록은 한국쪽에는 없고 일본서기 신공조 52년에만 나온다. 백제 왕자가 일본 천황보다 높다고 보기는 당연히 힘들지만, 그렇다고 백제 왕이 칼 하나 주겠다고 일본까지 갈리는 없다. 게다가 그 시기는 4세기 말 ~ 5세기 초라 백제가 백제 역사상 가장 막강한 국력으로 팽창에 열심이었던 시절인데 그런 시기에 왕이 자리를 비울리 없을 것이다. 일본이 "헌상"에 목을 매다는 이유는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 칼을 바쳤다는 것은 일본이 고대 삼한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물증이 되기 때문이다. 하여간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이고, 남아있는 문서 기록이 그리 많지 않은 시절인지라 논란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칠지도도 KBS <역사야 놀자>, <HD 역사스페셜>(고두심 진행)에서 다룬 바 있으니 그 방송들을 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

부여국립박물관 관람은 대충 마치고, 실망감을 뒤로 하고 부소산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소산성은 첫번째 글에서도 썼듯이 1993년에 찾은 후로 14년만에 찾은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거의 내 기억에 남은 것은 없고 낙화암과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다.

부소산성 정문을 지나 내가 걸은 길은 성의 중심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5 부소산성 정문)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호(의외로 성흥산성이 사적 4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구이리, 구교리 일대, 면적 960, 828m². 부여읍 서쪽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접한 부소산(해발 106m) 산정에 테뫼식 산성을 먼저 축조하고, 그 주위에 포곡식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 포곡식 산성은 무왕 6년(605년)에 축조되었고, 산 정상을 중심으로 쌓여진 태뫼식 산성은 동성왕 22년 (500년)에 쌓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백제 시대 부여는 부소산성으로 뭉뚱그려진 2개의 성벽과 부여를 둘러싼 나성의 성벽 3개로 수호되고 있던 셈이다. 538년 성왕 16년에 이곳으로 천도하여 123년 간 도읍지였다가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된 곳. 낙화암의 전설이 살아 있는 곳. 이곳이 부소산성이다. 삼국사기에는 사비성, 소부리성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전에 삼국은 주로 국경 지대에서 공성전을 벌여 조금씩 세력을 넓혀왔다. 백제 역시 마찬가지여서 신라와 국경 지대에서 공성전으로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히고 백제 세력을 넓혀왔다. 그 중 제법 알려진 공성전이 대야성 전투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허를 찔렀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때 다른 모든 지역은 버리고 오직 바그다드만을 목표로 고속 기동전을 벌였던 것처럼 곧장 사비성으로 진격한 것이다. 백제군 병력 대부분이 지방 산성과 국경지대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그들을 모두 무시하고 오직 사비성만을 목표로 달려들었다. 황산벌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와 신라 김유신의 5만 병력간에 벌어진 전투는 익히 알려졌지만, 백제군이 신라군을 상대로 5천명밖에 동원할 수 없었던 것은 나머지 병력을 미처 동원할 수 없었던 탓이다. 물론 이때 고스란히 남은 다른 지역의 백제군은 이후 3년간 백제 전역에서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부흥운동을 벌이게 된다. 지금 미국이 5년째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발목이 잡혀 헤메는 것처럼.

정문의 건축 양식은 전혀 성문같지 않다. 아마 이 지역에서 전쟁이 날 가능성이 지극히 떨어진 조선 시대에 지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문에 세워진 표지판에도 성문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용인민속촌과 사극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선시대 마을 동헌의 입구같다. 여기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찍어도 그냥 넘어갈 지도 모르겠다. 백제 시대 부소산성의 진짜 성문은 어떻게 생겼을까? 성흥산성에서도 그 터만 남아 원형을 알 수 없다. 사극 <대조영>에서 본 그런 스타일이었을까, 아니면 <태왕사신기>에서 백제 관미성으로 설정된 성의 성문같은 모습이었을까. 뭐 <대조영>에서 나온 성들의 성문이야 조선 시대 세워진 성을 무대로 찍었으니 넘어가자. 백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고구려 동명성왕의 양아들이랄 수 있는 온조와 비류 형제가 (드라마 <주몽>에서는 소서노가 두 아들을 이끌고 직접 남하했다)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 성들도 초기 고구려 형식이었다가 독자 발전하지 않았을까. <백제 산성의 이해>라는 책에서는 뭐뭐만 있으면 모두 신라의 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해라는 언급이 있는데, 그 책에서도 백제 성들의 성문에 대해서는 그닥 언급이 없다. 아차산에 올라갔을때 느낀 것이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군사 요충지는 계속 군사 요충지이기 때문에 후대의 나라들은 자신들 방식으로 성을 개축하거나 증축한다. 남한산성도 처음 축성된 것은 백제 시대였지만,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남한산성은 조선식이다. 아마도 그런 사정때문에 백제 성의 성문은 아마 타임머신으로 그 시대로 돌아가서 찍어오기 전에는 모를 것 같다. 실제로 부소산성도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사용되면서 그들 식으로 개축되었다. 아뭏튼 성문이 성문답지 않다보니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다.

성문을 바라보고 왼쪽에서는 백제 왕궁터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왕궁터도 너무 작다. 혹자는 검소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인데, 백제 문화가 검소한 지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을 보면 그 정도 가지고 사치스럽다고 평가하기도 난감하지만, 반드시 검소하다고 하기도 힘들다. 아직 백제 유물이 많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왕궁터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다.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것이 백제 왕권을 재확립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는데, 조선 시대 사대부 양반집 규모로 왕궁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비천도를 위해 성흥산성(가림성)도 쌓고 부여 나성(이번 여행에서는 가보지 못했다)도 쌓은 백제 왕실이지만, 왕궁 터는 너무 작아서 정말 왕궁터가 맞나 의심스러웠다. 우리나라 산성들은 평시에는 군대만 주둔하다가 전시에 인근 백성들까지 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전을 하는 식으로 운용되었으니 부소산성 역시 성내에는 특별한 왕궁터로 의심될만한 곳은 없었다. (조선 시대에 축성된 해미읍성이 오히려 예외에 해당하는 경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6 부소산성 내 산책로)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7 다른 산책로)



부소산성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잘 다듬어진 산책로다. 사진7도 산책로가 맞긴 한데, 원래부터 산책로였는지, 아니면 과거 성벽을 산책로로 조성했는지 모르겠다. 토성의 성벽은 시간이 지나 관리가 안되면 조금씩 무너져 내려 원래의 형태를 알 수 없을 뿐더러 흙언덕으로 잘못 알기 쉽상이다. 하지만, 성벽이든 산책로든 사람이 일단 걸어서 통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병력도 물자도 이동하기 때문이다. 그때문인지 저 산책로는 옛날에 흙으로 쌓은 성벽 자리에 축대를 세우고 쌓지 않았을까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8 전형적인 토성 성벽)



사진8이 흙으로 쌓은 성벽이다. 무심코 보면 그냥 단순한 언덕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져내린 모습이다. 그나마 여기는 복원 공사 여부는 모르겠지만 형태가 좀 남아 있다. 성 안쪽에는 성벽인지 흙무더기인지 구분하기 힘든 곳도 있다. 성벽과 안쪽의 병사들 통로의 구분도 사라진 상태라 원래 성벽의 모습은 가늠하기 힘들다. 지금은 산책로로 사용한다. 사람과 물자가 이동하기 쉽게 다져놓은 것인지라 산책로로 사용하기에도 좋다. 뭐 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성흥산성에서 동벽은 전혀 산책로로 사용하기 안좋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9. 언덕처럼 보이는 성벽 흔적. 유지 관리가 안되면 저렇게 된다)


우리나라는 돌로 만든 성보다 흙으로 쌓은 성이 더 많다. 예전에는 석축이 토축보다 앞선 기술이라는 식으로 얘기되었지만, 축성기술의 방법의 발전 단계 문제가 아니라 재료를 인근에서 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때문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다. 조선 건국과 동시에 쌓기 시작한 한양성도 상당부분이 토성이며, 조선 시대때 평양성증축을 담당했던 평양감사가 돌을 구할 수 없어서 묘지의 석축을 500여개 징발해서 사용했다가 유배당한 기록 등에서 보듯이 인근 주변에서 어떤 재료를 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성의 축성 재료를 결정했던 것 같다. 재료를 멀리까지 구하러 가야한다면 공사 기간부터 문제가 될테니 말이다. 그리고 모든 건축물이 그렇지만 성도 유지 보수를 해야 한다. 사진 속 옛날 성벽이 무너져서 흙언덕처럼 바뀐 걸 보면 알 것이다. 뭐 과거 로마 군단이 닦은 로마 가도가 유지 보수를 멈춘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멀쩡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래도 그 로마가도도 결국 황폐화되어 못쓰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성을 쌓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쉽게 구할 수 있어야 빠르고 쉽게 유지보수를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평시라면 몰라도 전시에는 그 이점이 더 할 것이다. 현대의 군대도 최신 무기를 획득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항상 유지 보수에 많은 시간을 들이는 것도 그때문이다. "전력화"라는 것도 단순히 생산을 한 후 부대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정비 및 수리 부품 제공 등의 체제가 갖춰졌을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들 성벽은 성 안쪽의 흙을 파내어 바깥에 쌓는 식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원래부터 존재한 자연 경사에 안쪽에서 파낸 흙을 쌓아서 경사도와 높이를 올려서 천연의 벽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 어디에선가 돌을 가져와 다듬어서 무너지지 않도록 쌓는 것보다 재료 구하는 것도 쉽고, 축조하기도 쉬울 뿐더러 빨랐을 것이다. 물론 공격자는 석축 성을 공격할때처럼 사다리를 가져올 필요는 없겠지만, 어차피 산 위에 자리한 산성은 산 자체가 공격자를 일단 지치게 만드니 효과는 별 차이 없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서울성곽도 석축뿐만 아니라 흙으로 성벽을 쌓은 부분도 적쟎이 있으니 말이다.

잠시 성벽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은 울창했고, 바람은 시원하다. 1300년전에 백제군이 성벽 안쪽에 있고, 바깥에 나당연합군이 몰려 있는 광경을 상상했다. 나당연합군의 병력에 비해, 한 국가의 왕성이라고 하기에 이곳은 너무 작게 느껴진다. 비록 부여읍을 둘러싼 나성이 있다고 하지만 최후의 보루라고 하기에는 부소산성이 너무 작게 느껴진다. 왜 이곳을 굳이 도읍지로 정했을까?

웅진 백제 시절 백제 왕권은 무척 약했다. 한성을 잃고 개로왕마저 전사한 백제 왕실이 허겁지겁 도망친 곳이 웅진(공주)였다. 그러다보니 귀족들이 왕실을 우습게 보게 되고, 사정이 궁한 왕실은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고. 나라의 큰 부분을 잃어 신뢰를 잃은 지도자에게 사람들이 반항하고 반발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도 그렇고. 백제는 일단 귀족들의 반항을 누르는 데 실패했다. 만일 웅진에서 귀족들의 반항을 누르는데 성공했다면 사비성으로 도읍을 천도하는 일은 없었을것이다. 어쨌거나 백제 왕실은 사비로 도읍을 천도했다. 부소산성은 부소산이 낮기는 하지만, 뒤에 백마강과 낙화암 덕분에 적어도 그쪽으로는 적군이 쳐들어올 가능성인 낮은데다가 주변 평야 지대 덕분에 지대도 넓고 식량 확보도 손쉬워서 이곳을 선택한 모양이다. 웅진에서 멀지는 않지만, 웅진을 기반으로 한 귀족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기에는 이곳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부여읍 주변에는 성흥산성있는 성흥산 처럼 곳곳이 산이고 부여로 들어가는 길은 산과 산 사이를 꼬불꼬불 지나서 들어가야 해서 외곽에서 적을 막기에도 유리했다고 생각했을까? 성흥산성 말고도 증산성, 청마산성, 석성산성 등 동서남북으로 산성이 축조되어 사비를 보호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에게는 그 어느 것도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오로지 사비성만 보고 달렸고, 병력도 두 나라를 합쳐 거의 20여만에 달했으니 말이다.

......................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작고 산성도 낮다. 나성(외성)과 내성(부소산성)이라지만, 부소산성의 성벽이 너무 낮아 성벽 넘기는 누구네 집 담장 넘듯이 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고, 도저히 궁녀만 3천명이 거주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그 1/100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성안에 주둔할 수 있는 병사들 숫자도 고작 몇 천명도 주둔하기 힘들어보였다. 수도로서 다른 곳은 없었을까? 내가 백제 왕이었다면 어땠을까? 한성을 빼앗긴 이래 고구려와 새로운 국경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이렇게 좁고 작은 곳을 선택했는지 잘 모르겠다. 웅진을 떠나고 싶어하는 백제 왕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왜 하필 부여였을까? 다른 곳은 후보지로 떠오른 곳은 없었을까? 지금의 광주 광역시 정도만 해도 무등산 덕분에 꽤 괜찮을 거 같은데 말이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국경은 정사에서 얘기하는 국경이다. 그러니 야사 또는 "진정한 한민족 역사"라고 믿고 있는 쪽에서 얘기하는 국경으로 태클은 걸지 말라. 꼭 "그건 님께서 진정한 백제의 강역과 진정한 한민족 역사를 모르셔서 그렇습니다. 백제는 대륙에 있었습니다"같은 얘기를 하며 온갖 "자료"를 들이미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내용들을 아주 모르는 바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참 걷다가 영일루에 이르렀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정문에서 낙화암과 고란사로 가는 길이다. 왕실의 마지막 보루인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되던 날, 3천 궁녀가 떨어졌다는 낙화암으로 가는 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10, 영일루)



영일루는 백제때 유적이 아니다. 그렇다고 고려나 조선시대 유적도 아니다. 무려 1964년에 세워진 정자다! 멀리서 봤을때 백제 때 정자가 아직도 남아 있다니! 라며 기대만땅이었는데, 안내판을 읽어보곤 실망했다. 생각해보니 1400년 전에 그것도 침략군에 폐허가 되었을 이 성안에 당시 유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0%다. 한심한 생각을 했다며 머리를 두들겼다.

원래 이곳은 영일대라 하여 해를 맞이하는 장소로 영일대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고 한다. 계룡산 용천봉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곳이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은 남아 있는 게 없고, 1964년에 세워진 영일루 정자와 그 옆에 작게 보이는 매점만 달랑 있을 뿐이다. 영일루에 올라가보니 제법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곧 발걸음을 돌렸다. 난 백제를 보러왔지, 1964년에 세워진 정자는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최종 목적지는 고란사와 낙화암이었으니. 그리고보니 93년에 갔을때 낙화암은 기억나는데 고란사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전날 마신 술이 덜 깨었었나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 11 군창지 유적)



영일루 옆에 있는 이곳은 군창지 유적터다. 군창은 말 그대로 군부대용 창고다. 무기와 군량을 저장하던 곳이다. 지금 사진에서 보다시피 주춧돌과 흔적만 남아 있다. 사진으로는 그닥 커보이지 않지만, 발굴 중인 백제 왕궁터보다 넓게 느껴졌다. 정문 옆에 발굴지가 왕궁터가 맞다면 백제 왕실은 전쟁 대비는 확실히 해놓은 셈이다. 군창지가 왕궁 규모였으니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 12 수혈 유적지)


군창지를 지나보니 뜻밖에 유적지에 이르렀다. 구석기 시대 이후 발전된 수혈 유적지다. 수혈이란 청동기 시대 주거의 한 형태로서 집 바닥이 땅 밑으로 파고 들어간 형태의 주거지를 말한다. 순 우리말로 하면 움집이 된다. 위의 사진에서도 바닥이 땅 밑으로 파고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혈식 거주지는 구석기 시대 이후 오랜동안 인류의 주거 형태로 자리잡아 왔다. 동굴 주거지도 이용했지만, 동굴이 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수혈식 주거지도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기둥을 세워 지붕을 얹을 수 있는데, 굳이 땅을 왜 팠을까? 조금이라도 추위를 피해 땅밑으로 파고든 걸까? 대략 60cm ~ 120cm 정도 파고 들어갔다고 하니

땅을 파서 바닥을 내고 중앙에 지붕을 받칠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서까래를 얹었고, 이어 벽과 지붕을 세웠다. 구석기 시대에는 인디언 천막같은 원추형이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네모난 형태(장방형)으로 바뀌어갔다. 일단 그렇게 기둥과 지붕, 벽을 세우면 내부에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중앙에 난방을 위한 화덕을 설치하고 잠자는 곳과 집기류를 보관하는 장롱같은 것을 두었다. 사람이 살기에는 부족하지 않는 시설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유적이 부소산성 안에 있는 게 신기했다. 설마 의자왕이 이곳에서 궁녀들과 어울린 것은 아니겠지?

백제 시대 수혈 유적지는 몽촌토성에 위치한 몽촌역사관과 암사동 구석기시대 유적지에도 보존되어 있으니 서울에 사시는 분들은 가보시는 것도 좋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13 반월루)



부여읍내 전체를 조망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에 오르면 부여읍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부소산성도 걷기에는 만만치 않은 넓이라 잠시 이곳에서 쉬어가는 것도 좋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14 반월루에서 바라본 부여읍 풍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15 반월루 인근의 옛날 성벽 자리에 만들어진 산책로)



반월루 근처에도 옛 성벽을 이용한 산책로가 있었다. 일부러 산책로로 만든 것 같지는 않고, 사람들이 많이 오가다보니 자연스럽게 길처럼 만들어진 것 같다. 1400년이나 지났지만, 그때 사람들이 만든 성벽이 지금은 산책로로 이용되는 것이다. 반월대와 사자루를 지나 나는 드디어 낙화암과 고란사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16, 낙화암과 고란사로 가는 오솔길)



절벽을 따라 난 낙화암 가는 길은 초겨울이 아니라 봄과 여름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남지와 같이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17, 백화정)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18, 백화정에서 바라본 백마강)



낙화암에 세워진 정자인 "백화정"이다. 문제는 이 정자도 백제 때 것이 아니라 1920년대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백마강을 내려보는 풍경이 멋지긴 하지만. 이 정자는 한 시 모임에서 궁녀들의 혼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세웠다고 한다. 돈이 많았나 보다. 아뭏튼 이것도 조선시대 양식이고 백제 식은 아닌 셈이다. 부소산성 안에 백제 시대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무너져 언덕처럼 보이고 산책로로 사용되는 성벽과 군창지 뿐인 셈이다.

궁녀들이 낙화암으로 몸을 던졌다는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이지 싶다. 부소산성을 대충 훑어보기는 했지만 성안은 좁아서 궁녀 3,000명이 있을 곳이 없다. 인근 백성과 군인들만으로도 꽉 찰 공간이다. 게다가 왕궁터의 규모를 봐서도 궁녀만 3천명이 있을 곳이 못된다. 몇 층짜리 연립주택 같은 건물을 몇채를 지을 공간도 없고. 궁녀가 3천명이 될라면 당시 궁녀들이 지금의 직장 여성들처럼 출퇴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과연 그랬을까?? (멋대로 상상해보다) 아무리 의자왕이 타락했기로소니 궁녀를 3천명이나 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왕궁의 규모로 봐서 궁녀가 3천명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몇 십명에서 100명 단위까지는 되었겠지. 그들이 낙화암으로 몸을 던졌을지는 모르겠다.

백화정에서는 낙화암의 전체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고란사로 내려가도 전체 모습을 볼 수는 없고, 구드레공원쪽으로 향하는 소형 여객선이라고 불러야 할 "유람선"을 타야 전체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이 (시간 상으로는 나중에 찍은 사진이지만) 낙화암의 전체 모습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19 낙화암)



밑에서 보니 꽤 높다. 부소산 전체는 야트막한 말 그대로 평이한 야산이지만 (네덜란드나 덴마크 정도 가면 106m 산도 굉장히 높은 산이 되긴 하지만) 낙화암만 보고 있으면 험한 야산처럼 보이겠다. 하지만 이 바위도 의자왕과 궁녀들의 전설이 아니었으면 별 볼일없는 바윗덩어리에 불과했겠지. 사진에는 안나왔지만, 낙화암 옆에 정말 얼마 안되는 공간에 자리잡은 절이 고란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20 고란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21. 백마강에서 바라본 고란사와 낙화암. 유람선에서 찍은 것)


이것이 고란사다. 이게 전부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바위가 낙화암이다. 내가 고란사에 도착했을때는 관광객들이 관광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일본인들이다. 일본 왕이 옛 백제인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있고, 지금의 일본 왕도 몇년 전에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는 발언을 해서 화제가 되었던 적도 있다. 앞서 언급한 칠지도도 예전에 최인호의 <잃어버린 왕국>에도 나왔지만 백제와 일본의 관계는 부시와 이명박의 관계를 뛰어넘는 관계였다. 백제 부흥군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부여풍은 일본에 파견되어 있었던 왕자였고, 당시 일본 왕은 수만의 병력을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보내기도 했다. 물론 백강 하구에서 나당연합군에 괴멸당하긴 했지만. 하지만 저 일본인들이 그런 사실을 알지는 모르겠다. 저 사람들 머리 속에는 임나일본부설만 잔뜩 들어있는 거 아닐까?

하여간 그건 그렇고, 고란사는 창건 연대도 불확실한 절이다. 이 절이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함락될 당시에 지금 이 자리에 있었는지도 불확실하다. 창건 연대를 기록한 문서가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그렇다. 해남군에 기암괴석 위에 세워진 작은 암자도 유명하지만, 고란사는 절 뒤의 약수 덕분에 유명하다. 절 규모는 아담하지만, 낙화암 전설과 함께 하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암자는 부여읍내로 나가기 전에 편안한 마음으로 쉬기에 좋은 것 같다.

여기서 바라보는 백마강은 백화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과 느낌이 달랐다. 아무래도 3천 궁녀 전설이 백화정에 배여 있어서 그런가? 낙화암 정상(백화정)에서는 "궁녀가 3천명이었을까? 정말로 3천명이었다면 그들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3천명이 아니었으면 몇 명쯤이었을까? 강 건너편에도 나당연합군이 배치되어 있었을까?"같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직업병(?)같은 피곤한 생각만 떠올랐지만, 고란사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은 평온한 느낌이었다. 아무 생각도, 아무 느낌도 없이, 그저 흐르는 백마강만 보일 뿐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21 고란약수)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22 약수 옆 불상들)



고란사 약수와 그 옆에 세워진 작은 불상들이다. 불상들이 너무 귀엽다. 만화 캐릭터로 써도 되겠다. 물은 너무 맑았지만 마셔보아도 주변 편의점에서 파는 생수(?)와 별 차이점을 모르겠다. 그래도 고란사의 스님들은 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정말 속세의 생활에 지나치게 찌든 자라면 할 수 있는 생각만 떠올랐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보자고 떠나는 여행인데, 여행 가서도 결국 그런 생각만 하니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23 고란사의 범종)



고란사 옆에는 선착장이 있다. 유람선 선착장이라고 되어 있긴 하지만, 배는 아무리 봐도 유람선이 아니라 그냥 작은 통통배 수준의 여객선이다. 한강 유람선까지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 작았다. 출발한 지 10여분만에 구드레 공원 선착장에 도착하니 유람이 아니라 그저 고란사에서 부소산성으로 되돌아가 부여읍으로 나가기 싫은 사람들을 수송하는 수송선쯤 되겠다. (가보시라. 은근히 고란사까지 오면 웬지 다시 부소산성으로 올라가기 싫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24 유람선 여부는 좀 의심스러운 배가 가르는 물길. 11월말이었지만 시원하게 느껴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25 유람선 내부)



저기 보이는 스님은 고란사에 계시는 스님이다. 볼 일이 있어 부여읍내로 가시는 모양이었다. 낙화암을 올라가 (물론 계단으로 ;;;) 부소산성을 지나 부여읍내로 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람선으로 가는 게 빠르다. 아뭏튼 낙화암과 고란사는 부소산성을 둘러볼때 무조건 마지막에 가야 한다. 계단을 보고나면 걸어서 다시 부소산성으로 돌아갈 엄두가 안난다. 유람선은 좋은 아이디어같지만 내 기억에 꽤 비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NIKON D40 |

(사진26 구드레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옛날 배)



유람선 도착장에 정박해 있는 옛날 배다. 중앙에 선실이 있는 것은 현대의 요트도 마찬가지인걸 보면, 형태는 1000년, 2000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저 배를 보자, 저 배가 타고 싶어졌다. 실제로 운항할 것도 같은데, 그저 빈 배만 덩그러니 몇 척 떠 있었다. 선착장 주변은 이때만 해도 공사가 한창이어서 엉망이었다. 그렇게 올라온 나는 곧장 버스터미널로 향해서 서울로 향했다. 어영부영 1박 2일의 부여여행을 대충 마감한 셈이다.

부여를 1박으로 여행잡기에는 곤란하다는 의견도 있던데,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물론 부여읍내만 놓고 보면 1박 잡기 애매한 코스다. 공주와 묶어서 1박 2일 코스로 가는 게 좋다는 의견도 있지만, 부여읍내만이 아니라 부여 주변까지 코스로 만들면 1박 2일로도 약간 부족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부여읍내의 부소산성, 부여나성, 국립박물관, 송산리 유적, 궁남지, 구드레공원, 정림사지, 능산리 유적, 송국리 유적 등만 해도 하루에 다 보기에는 곤란하고, 부여군 일대의 관광지를 다 둘러보는 코스를 개발하면 1박 2일로 부여 일대를 돌아보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서동요 셋트장도 관광지가 되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으며, 한국곤충박물관과 아직 부여관광 웹사이트(http://www.buyeotour.net/)에는 조성 중이라고 되어 있는 "백제역사재현단지"도 조성이 완공되면 볼만한 곳이 될 것이다. 부여도 은근히 볼 곳도, 가볼 곳도 많은 곳이다.

내가 가장 권할 수 있는 부여 관광 코스는 산성 위주로 돌아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사비성(부소산성)의 이미지는 백제 멸망 당시 수도라는 것이다. 당시 백제 수도의 방어 체제는 전적으로 산성 위주였으므로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한 주변 산성 방어 체계를 머리에 담아 당시 방어체계를 조망할 수 있는 산성 관광 코스를 권하고 싶다. 백제 수도 사비의 방어체제는 한성 백제 시절과 흡사하여 중앙에 부소산성(풍납토성)을 두고 북쪽에 증산성(아차산성과 몽촌토성), 남쪽에 성흥산성과 석성산성(남한산성)을 둔 체제다. 괄호 안에 성은 풍납토성과 그 주변 성들이다. 한성과 사비가 매우 비슷하게 방어 체제를 구축해놓았다. 아래는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한 주변 산성들의 간단한 위치를 그려본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들 성들의 위치를 머리 속에 그려본 후 당시 백제 수도를 어떻게 지키려 했는지를 둘러보고 나당연합군이 어떻게 저들 성들을 무시하고 사비성으로 곧장 진격했는지를 가늠해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 될 것 같다. 다음 번에 부여를 가게 되면 이번에 못갔던 산성들(증산성, 석성산성, 청마산성, 청산성, 부여나성)부터 한바퀴 돌아봐야겠다.



Trackback 0 : Comment 0

Write a comment